[카일의 수다#766] 스위스 여행 15 물 위에 머문 세월, 루체른의 카펠교 산책기
루체른의 구시가지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다. 바로 루체른의 상징이라 불리는 카펠교(Kapellbrücke)다. 로이스강 위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14세기 초,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한다.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평화로운 다리지만, 한때는 병사들이 오가던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.
다리 중간에 서 있는 팔각형의 탑은 수탑(Wasserturm)이라고 불리며, 예전엔 감옥이자 보물창고로 사용되었다. 물 위에 세워진 이 탑이 루체른의 전경 속에서 묘한 균형감을 만들어낸다. 마치 과거의 기억을 한 손에 쥔 채, 여전히 현재의 도시를 지켜보는 듯한 모습이다.
다리 안쪽에는 17세기에 그려진 목재 그림들이 지붕 아래를 따라 걸려 있다. 루체른의 역사와 전설을 담은 이 그림들은 1993년 큰 화재로 대부분 손상되었지만, 시민들의 정성으로 복원되어 지금은 다시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. 그 흔적이 오히려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어 더욱 인상 깊다.
다리를 걸으며 물 위를 스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오래된 나무 냄새가 은근히 퍼진다. 다리 양옆에는 붉고 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, 마치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든 예술 작품 같다. 강 건너편으로는 루체른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, 멀리 보이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배경이 되어 준다.
화려하지 않지만,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이 다리 위에서는 스위스의 정갈한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. 루체른을 방문한다면, 카펠교 위를 걷는 그 순간만큼은 꼭 천천히, 아주 천천히 즐겨보길 권하고 싶다.